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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AS

회자정리


part 1. 

2009년 1월 18일 새벽 2시경 아버지전화가 왔다. 

"광아,오늘 오전에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표 두장만 끊어놓아라."
"갑자기 왜요?"
"할머니께서 거의 운명하실때가 된 것 같다."

순간 새벽잠은 달아나고 어느덧 나는 인터넷으로 비행기 티켓 두 장을 끊으며 가슴 졸이고 있었다.
 

part 2. 

새해가 되면서 나에게는 충격적인 일들이 조금씩 일어났다. 우리 외가 친척들은 정말 가족처럼 지내는 분위기였고 세 명의 이모들은 나에게 엄마와 같은 존재였다. 그 중에 특히 고추장을 이용한 음식을 유난히 잘 하셨던 둘째이모, 지난 추석때만 해도 우리와 같이 훌라를 즐기며 농담을 주고 받았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숨이 가쁘시다며 병원에 입원하셨다. 식구들도,나도 가벼운 증상으로 여기고 어서 완쾌되길 바랬었는데 갑자기 중환자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모가 치료를 받겠다고 병원으로 스스로 걸어서 들어가신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던 차였다.  

이모의 병은 아직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이름도 제대로 지어지지 않은 병이었다.  체내의 근육이 사라지면서 폐가 굳어가는 병, 그리고 우리몸은 병원체가 들어오면 항체를 생성하여 그것을 물리치게 되어있는데 반대로 오히려 그 병원체와 결합하여 몸을 공격하는 듣도보지도 못한 희귀한 병이었다. 

어찌 이럴 수 있는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중환자실이라는곳을 가보았고 거기에는 스스로 숨을 쉬지 못하셔서 인공호흡기를 달고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이모가 계셨다. 이모를 보자마자 눈물부터 떨어졌다. 외가 친척들이 모두 올라오셨고 모두 눈불바다가 되었다. 원인을 알지 못하는 병이기에 원인도 모르게 낫지 않을까 하는 한가닥 희망만이 우리 외가 식구들을 지탱하고 있었다.

 
part 3. 

다시 1월 18일 오전 10시경,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실 아무도 전화오지 않았으면 했다. 가족중 누군가 전화를 나에게 한다면 그건 분명히 나쁜 소식일 테니까. 

"오빠, 할머니 돌아가셨대..." 

실감이 나지 않아서 일단 알았다고 하고 끊었다. 한참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족중에 누군가 돌아가신 일이. 정신이 없었고 진정하는데에 시간이 걸렸다. 솔직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맞았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이모가 계시는 아산병원으로 동생을 데리러 시동을 걸었다.
 

part 4. 

이모가 계시는 아산병원에 꽤 자주 들렀는데 이모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아 보였다. 그냥 이대로 유지만 하시는정도라고 느껴졌다.아산병원에 도착하여 일단 중환자실로 가서 이모를 보았다. 절대 마지막이지 않기를 바라며.

"이모!"
"......"
"이모야 광이왔다, 이모야."
"....." 

내 목소리는 듣고 계실거라 생각했다. 최근에 보았던 '잠수종와 나비'처럼 이모는 내 모든 말을 똑똑히 들으실 것이라고 믿었다.몸속에 주입된 질소때문에 몰라보도록 퉁퉁 부은 이모의 손을 잡았다.

"이모야,조금만 더 힘내라...응? 이모야,나을거니깐 힘내라. 응?"

착찹한 마음으로 중환자실을 나오며 기도했다. 제발...
 

part 5. 

동생을 데리고 부산으로 향했다. 친척들은 걱정되는 마음에 KTX를 타고 가라고 하셨지만 서울역까지 가서 표끊고 열차타고 내려서 할머니 장례식장 까지 가느니 운전해서 가는것이 빠를거라고 생각했다. 마침 외삼촌도 부산 집으로 가실거라고 하셔서 동승하셨다.승희는 피곤한지 앉자마자 뒷좌석에서 골아 떨어졌고 나와 삼촌은 별 대화 없이 부산으로 열심히 향했다.

일기예보가 제대로 맞을 때도 있구나. 중부내륙도로에 다다르자 비와 함께 안개가 자욱하여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가 없었다.  보이는 자동차마다 비상등을 깜빡이며 서행하고 있었다. 문득 외삼촌이 진득한 부산억양으로 말씀하셨다. 

"니 평소에 할머니한테 섭섭하게 해드렸나?"
"왜요?"
"할머니 보러 가는데 이렇게 안개가 자욱한거보니까 할머니가 니 미워서 안개뿌리신것 같은데?"
"........흠." 

허긴 그럴듯도 했다. 평소에 아버지께서 그렇게 할머니 할아버지께 연락 좀 드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제대로 지킨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명절때 병원으로 찾아뵐때는 마음이 아프지만 할머니는 내가 장가갈 때까지, 아니 오래토록 살아 계실거라는 것을 당연한듯이 생각하고 있었다. 1999년 대학입학때 그 높은 오르막길로 걸어서 나를 축하해주러 오신 분이었다. 불과 10년이 지났을 뿐인데, 뭐가 그렇게 바뀌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냥 우리 할머니는 나를 손자중에 제일 사랑해주셨던 할머니였다. 

"뭔가 좀 찔리는 모양이네..?" 

외삼촌의 말씀이 정수리에 핀을 꽃는 느낌이었다. 

"예, 좀 찔리네요"
"봐라,그러니깐 날씨가 이렇지." 

자욱한 안개속을 한시간 가량 운전하다 보니 저 깊은 우주속으로 빠져버리는 기분이었다. 순간 어지럽고 내가 어디를 달리는지 모를 정도였다.
 

part 6. 

오후 9시가 넘어서야 장례식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많이 늦지는 않았다. 서둘러 2층으로 올라가니 TV나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수 많은 국화속에서 환하게 미소짓는 할머니... 아직도 실감나지 않았다. 그냥 부르면, 

"애구 우리 과이(광이) 왔나~?"

라며 기뻐해주실것 같았다. 할머니께 약주 한 잔 올리며 절을 두 번 했다. 생전 뵙지도 못한 증조 할아버지, 증조 할머니 제사때 절을 두 번 해본것. 설날 차례 지낼때 조상님들께 두 번 절해보고는 처음으로 내 할머니께 두 번 절을 올렸다. 이상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평소때도 거의 못 뵈었으니까. 아버지께서 약주를 한 잔 하시더니 할머니 이야기에 그만 조용히 눈물을 흘리신다. 아버지께서 우시는것을 처음 본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니 덩달아 나도 눈물이 떨어졌다. 시간은 새벽을 향해 가고 있었고 아버지와 엄마, 삼촌, 고모, 고모부들 모두 하나 둘씩 잠자리로 들어가셨다. 나도 구석에서 두루마리 화장지를 베개삼아 눈을 붙였다. 기분이 이상했다.
 

part 7. 

세 시간쯤 지났을까. 눈이 떠졌다. 오전 8시 즈음이었다. 눈을 비비며 칫솔과 비누,수건을 가지고 화장실로 향했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양치질을 하고 있었는데 동생이 빨개진 눈으로 나에게 말했다. 

"오빠,이모 방금 돌아가셨대..."
"....." 

어안이 벙벙하며 이것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뭐라 할 말이 없을만큼 믿겨지지도 실감나지도 않는 이 상황을 어찌해야하나 생각했다.
 

part 8. 

잠에서 깨신 아버지도 양치를 하러 오셨다. 

"아빠,이모 돌아가셨대요....."
"진짜가...." 

연신 한숨을 내쉬는 아버지를 보며 속상했다. 사람이 너무 충격을 받으면 오히려 담담해지나보다. 아직 눈물이 흐르지 않는 나를 보니. 드라이아이스를 잡으면 감자기 뜨겁다고 느끼는것처럼. 갑자기 화상을 입으면 오리혀 너무 차갑게 느껴지는것처럼.
 

part 9. 

외할머니께 전화를 드린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신다.

"어이구 어머님....미야(우리이모의 집에서 부르는 별칭) 불쌍해서 어쩝니꺼......" 

이모들과의 추억은 나의인생에서 가장 즐거웠던 때에서 빼 놓을 수 없다. 늘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마음과 엄마같은 든든함을 나눠 온 이모들은 정말이지 나에게는 엄마와도 같다. 다시는 미야이모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눈물이 난다. 이모가 이모부랑 데이트 하던 20여년 전부터 기억이 생생하다. 이모부를 결혼상대자라고 집으로 초대하셔서 온 가족과 함께 인사를 나누며 담소를 나누었던 그 때도 생각나고 항상 나를 보면 장난치기 좋아하고 날 갈구는것(?)을 재미있어하던 이모였다. 명절때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오징어무침(일미)을 봉지가득 담아주던 이모였다. 신기하게도 이 모든 것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이모와의 지난 추억을을 떠올리게 했다.
 

part 10. 

"광아 아침인데 할머니께 약주 한 잔 더 올리지?" 

큰고모의 말씀에 향을 피우고 약주 한 잔을 더 올리고는 절을 두 번 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실감이 나나보다. 할머니와의 추억은 말 할 수 없이 많았다. 나는 솔직히 명절때 내 또래들도 많고 이모들도 많은 외가를 더 좋아했었는데어릴적에는 그걸 숨기지 못하고 표현하곤 했었다. 그저 어떻게 하면 빨리 외가로 가서 놀 수 있을까 하는 궁리를 했었던 손자가 무엇이 그리도 좋아서 뵐때마다 환하게 웃으셨을까. 조금만 더 있다 가라는 할머니의 부탁아닌 부탁도 뿌리치고 외가로 빨리 가자고 엄마아빠를 졸랐다. 

어릴적 우리 친가는 제사가 꽤 많았었던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우리가족도 부산에 살았으므로 자주 할아버지댁에 들르곤했다.할머니는 제사음식을 준비하시면서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들으시면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오양맛살 튀김과 새우튀김을 꼭 준비하셨다.어렸을적에는 그게 어찌나 맛있던지 할머니 옆을 졸졸 쫒아다니며 하나둘씩 집어먹곤 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생각나는 것은 할머니의 그 온화한 눈빛과 따뜻한 말투였다.  

절을 하고는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할머니께 하고싶은 말씀이 너무너무 많았다. 한참을 그러고 꺼억꺼억 울었다. 할머니가 너무 그리웠다. 덩달아 생각나는 이모까지. 아...너무너무 슬프다.
 

part 11. 

내가 지금 이렇게 긴 일기를 쓰고 있는것은 지금 이 느낌과 이 감정, 그리고 할머니와 이모에 대한 추억을 그래도 오래토록 간직하고 싶어서이다. 신이 내린 선물 중에 가장 커다란 선물이 '망각'이라고 누가 그랬다. 이 슬픔을 계속 안고 살아간다면 어찌 제대로 살 수 있겠냐만은 너무 빨리 잊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기록하지 않으면 금방 날아갈것 같은 세세한 감정들까지 당분간은 잡고 싶다. 

서른, 어리지만은 않은 나이지만 아직도 세상을 잘 모르는 나에게는 슬프고 충격적이기만 한 이 일들.
 

part 12. 

할머니, 할머니 소원대로 이제는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세요. 그동안 고생도 많이 하셨고 아버지 말씀대로 부귀영화도 제대로 못누리고 가신 우리 할머니, 늘 할머니를 가슴속에 묻어둘게요. 음력 섣달 여드레 태어난 동네에서 가장 크게 울었던 광이가 여기 있습니다.  저 열심히 살아서 꼭 할머니 장손답게 자랑스러운 광이가 될게요. 할머니,또 찾아뵐게요... 

이모야, 엄마한테 아프다고 얘기 하지 말라며,그럼 보란듯이 나았어야지... 이모야...너무너무 아쉽다.  진짜 너무너무 아쉽고 슬프고 그렇다... 이럴줄 알았으면 이모가 만들어준 일미 천천히 먹을껄....이럴줄 알았으면 이모한테 더 잘할껄... 불쌍한 우리 이모...이모야... 우리가 벌써 헤어질때가 되었다는게 나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설날도 얼마 안남았고 내가 얼마나 기대했는데... 그래 가뿌노...아무쪼록 꼭 좋은 곳으로 가라 이모야.... 꼭... 늘생각할게. 
 

part 13. 

어제 아버지께서 약주를 한잔 하시면서 조용히 말씀하신게 자꾸 생각난다. 

"회자정리라고... 사람이 만나게 되면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있는데 막상 헤어지면 그렇게 섭섭할수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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